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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예배하는 이를 보라,
김재우 선교사

기꺼이 불편한 예배
  • 저자김재우
  • 출판이레서원
  • 발매2021.04.23

'연결되는' 예배

예배 모임에 참석해 찬양과 설교, 기도를 통해 분명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건만 예배가 끝나고 문밖으로 나오자 왠지 모를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내가 예배한 그 장소에 분명 많은 예배자들이 나와 함께 예배하고 있었으나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이들은 없었다. 나는 오직 예배인도자와 설교자 두 명을 만나고 온 느낌이다. 그것은 흡사 영화관에서 모르는 이들과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인데 같은 장면에서 웃고 울지만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 그곳에 있던 관객들은 나와 전혀 상관없이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예배의 경험은 좋지만 이런 고민이 든다. “과연 우린 언제라야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

이것은 온라인 예배 시대에 더욱 극명해졌다. 우리는 과연 함께 예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같은 시간대에 각자 예배하고 있는 것인가?

그림 1 – 각자 예배하지만 분리된 예배자들

이 그림에서 같은 공간과 시간대에 모여 예배하는 예배자들은 모두 예배인도자와 연결되어 있으나 예배자끼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각 예배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배의 경험을 간직한 채 예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구조의 예배에서 예배자끼리 서로 연결되는 경험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예배가 집에서 모이는 만찬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상황에서 나온 구절이 우리가 잘 아는 이 구절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 11:27)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성찬식에 앞서 개인적으로 성찬에 참여할 만큼 경건한 삶을 살았는지 점검하는 기준과 척도로 사용하곤 하지만 사실 이 구절은 교회가 함께 나누는 만찬에 어떤 이는 일찍 와서 먹고 어떤 이는 늦게 와서 먹지 못하는 상황으로 인해 생긴 공동체 안의 불평등, 즉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인한 공동체성의 상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해법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고전 11:33)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예배의 모습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정집에서의 만찬이 아닌 공연장 형태와 온라인 예배가 되었다. 예배자들은 분명 같은 시간에 무대나 화면을 보며 집중하고 있으나 찬양과 설교, 그리고 성찬식마저도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으로서 오늘날 예배는 함께 있으나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서로 분리된 예배자들의 모임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많은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된 예배를 추구할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한 “서로 기다리라”는 권면이 공동체가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해법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함께 ‘연결되는’ 예배로 모일 수 있을까?

그림 2. 서로 연결된 예배자들

이 그림을 이전 그림과 비교해 보면 예배인도자가 중심에서 물러나 한 명의 예배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 그림의 중심에 예배인도자가 있었다 해서 에배인도자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정교한 프레젠테이션이 주도하는 무대 중심이나 화면중심의 온라인 예배에서는 예배인도자와 설교자에 대한 의존성이 더욱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 그림에서 예배인도자는 스스로 무엇을 만들고 끌고 가려는 주도권을 내려놓고 현장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관찰하고 분별하며 예배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공동체로 반응할 수 있도록 돕는 촉진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앞으로 worship leader보다 worship facilitator라는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으면 한다.

함께 예배하는 이를 보라

무대 중심의 예배에서는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옆 사람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눈을 마주칠 수 없다. 의도적인 노력이 없이는 주변 예배자들을 바라볼 수 없는 구조이며, 우리의 몸 역시 바라보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졌기에 우리는 무대와 화면을 향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식탁에 둘러앉아 예배하지 않는다 해도 마치 식탁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음식을 즐기는 것처럼 예배할 수 없을까? 호스트가 베푼 만찬에서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서로 나누고 챙겨주는 모양새로 예배할 수는 없는 걸까?

성경은 ‘누구를 예배하는가?’ 못지않게 ‘누구와 예배하는가?’를 중요히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 진리를 가장 초라한 곳에서 가장 소외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마리아인들을 예배로 초청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을 예배로 초청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더 이상 꼭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필요가 없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예배의 형식 파괴를 선언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는 ‘누구를 예배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선포한 진리는 메시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서로 연결된 예배공동체가 탄생할 것, 즉 ‘누구와 예배할 것인가’를 예고한 것이다.

무대와 화면을 바라보는 예배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도울 수 있을까? 인도자는 예배를 준비하며 유튜브를 검색하는 대신 예배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으로 준비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각 예배자들이 예배 오기 전 처한 상황을 상상해보면 좋겠다. 어쩌면 진부한 제안일 수 있으나 성급히 예배 순서를 정하기 이전에 예배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는 당부를 하고 싶다. 그들과 함께 예배하기 위해 선곡과 편곡, 곡의 연결과 멘트도 모두 환대와 배려가 되었으면 좋겠다.

예배곡을 선곡할 때도 혹시 예배자들이 찬양하며 서로 바라보거나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곡이 있는지 살펴보자. 예배곡 작곡자라면 공동체성을 내용적으로만 아니라 체험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는 예배곡을 만들어 보도록 권하고 싶다. 예배 시작 시나 중간에 지금 ‘함께’ 예배하는 옆의 지체들을 상기할 수 있는 말들을 던지고 실제로 바라보게 도울 수 있고, 화면상으로나마 서로를 향해 손을 향하며 노래하고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함께 보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가족과 함께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사실을 예배중에 말로 전하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그는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한 예배자는 누구라도 외딴섬이 아니다. 누구라도 분리된 외딴섬으로 떠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나로 구주 삼고’라는 잘 알려진 찬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찬송을 비롯해 예배곡을 부를 때 나는 줄곧 눈을 감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눈을 뜨고 의도적으로 나와 함께 예배하는 내 옆의 예배자를 바라본다. 옆에 예배하는 이가 있다. 함께 예배하는 이를 보자. 그는 영원을 함께 보낼 나의 가족이다.

추천도서
기꺼이 불편한 예배 : 환대와 우정을 나누는 예배공동체
(김재우, 이레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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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5

글. 김재우
편집. 강은별
사진. 오병환(@saramsaz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