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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요일, 부활절 예배를 위한 제안,
김정 교수

사순의 시간이 어느덧 부활절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사순절에서 부활절로 넘어가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이번주 어노인팅 블로그에서는 예배학자 김정 교수님(현, 서울장신대학 교수)의 글을 나누려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에 대한 통찰과, 절기 예배를 위한 실제적 제안들로 이루어진 김정 교수님의 글을 통해 많은 도움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Triduum: 고난의 신비, 시간의 신비(1)
성금요일(Good Friday) 예배를 위한 제안
김정 교수

초대교회에 있어서 시간은 막연히 흘러가는 허무한 어떤 것이 아니고, 불가항력적인 추상적인 어떤 것도 아니며,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물질적인 어떤 것도 아니다. 초대교회가 시간을 신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그 시간 속에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정해진 시간에(“때가 차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알려지게 하셨으며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사의 역사적 사건을 겪게 하셨다. 성금요일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일어난 날이고 성토요일은 그리스도가 무덤에 묻히신 날이다. 일요일은 주께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날이요 부활의 날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부활 없이 올바로 이해될 수 없듯이 교회는 사흘을 가리켜 트리두움(Triduum)이라고 구별하여 부름으로써 죽으심-묻히심-다시 사심의 구원사역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한다.

1. 초대교회의 성금요일 예배

성금요일 예배에 대한 가장 초기 기록은 4세기 예루살렘 교회의 증언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에제리아(Egeria)의 기록에 따르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실제로 일어난 장소를 시간별로 방문하면서 기도와 시편 찬양을 올렸다. 이 예전은 성금요일의 전야라 할 수 있는 목요일 저녁부터 행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하루 시간은 전날 저녁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목요일 저녁에 감람산을 출발하여 겟세마네에 이르러 기도를 하고, 금요일 아침에 채찍 맞으신 곳에 이르러 기도한 후 골고다로 향한다. 골고다에서 감독(Cyril of Jerusalem)이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가져다 바라보게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의 시간 이해에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대교회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성금요일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을 중심으로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의 기도 시간을 재해석했다.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 AD 215년 경 저술)에 따르면 즉 제 삼시(오전 9시 Terce)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이며, 제 육시(정오 12시 Sext)는 휘장이 갈라지고 어둠이 임한 시간이고, 제 구시(오후 3시 None)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 장소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각 장소를 돌며 거기에 적합한 성경 구절(예언서에 나타난 수난 사화 또는 복음서의 내용)을 읽고 기도와 시편 찬양을 올리는 예전을 펼칠 수 있었다. 하루의 기도 시간을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맞춰 구조화 시킨 결과 초대교회는 구약의 오랜 기도 전통을 기독교화 시킬 수 있었고, 매일 기도의 기독교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나아가 기도와 삶이 분리되지 않았기에 실제 삶이 예배와 분리되지 않았다.

2. 성금요일 예배 제안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장애요소로 가득하다. 우리는 세속주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 산다. 개인주의는 교회 공동체성을 방해하고 소비주의와 편의주의는 신속함을 이유로 예전 집례의 순서와 내용을 생략하라 한다. 세속주의, 개인주의, 소비주의가 팽배한 세상 문화를 향해 십자가의 죽음 너머 부활을 기다리는 언약 공동체의 모습을 증언할 수 있는 성금요일 예배를 제안해본다. 버림받고 상처 입은 우리의 이웃에게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게 하자. 그리고 그 너머 오고 있는 희망의 메세지를 기다리게 하자. 아래 예는 초대교회로부터 오늘까지 이어져오는 십자가 경배를 포함한 성금요일 예배 순서이다. 성찬상 또는 강대상에 검은 천을 두르거나 초를 사용해서 “휘장이 갈라지고 어둠이 임한” 성금요일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

십자가 응시를 포함한 성 금요일 예배순서

  • 기도
    구약 성경
    이사야 52:13-53:12
  • 시편 챈트
    22편 (길이 조정 가능 1-2,7-8,14-21절)
    후렴 : 오 하나님 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 신약성경
    히브리서 4:14-16,5:7-9
  • 찬송
    149장
  • 복음서
    요한복음 19: 17-30
  • 설교
  • 십자가 응시
    (침묵으로 진행)
  • 성찬
    (세족 목요일에 미리 성별해둔 빵을 사용)
  • 성찬 후 기도
  • 침묵 가운데 마침

(1) 침묵

성금요일 예배는 침묵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많다. 십자가를 응시할 때 회중은 침묵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한다. 또한 성찬 후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침묵으로 조용히 떠난다. 성금요일의 특징상 회중은 침묵으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몸소 겪으신 주님의 일과 말씀을 기억하며 묵상한다. 침묵은 온 몸으로 외치는 깊은 울림의 비음성적 언어이다. 세상 문화는 자신을 알리려고 요란하게 군다. 그러나 침묵 가운데 모여 있는 예배 회중은 모임 그 자체로 매우 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성금요일에 모여 십자가를 응시하는 예배 회중은 단순히 십자가의 죽음만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그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승리에 대한 기다림을 증언한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너머 다시 살아나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을 이들의 모임은 부활에 대한 침묵의 증언이다.

(2) 십자가 응시

십자가를 성찬상 위에 먼저 올려두고 예배를 시작할 수도 있고, 순서가 되어 맡은이가 십자가를 위로 받들고 입장할 수도 있다. 이때 모든 회중은 일어선다. 집례자는 시편 118편에 나오는 구절로 회중과 화답한다.

집례자 : 보라 이 십자가를. 나무 위에 온 세상의 구원이 달리셨도다.
회 중 : 오! 오라, 와서 그 분을 경배하자.

화답 후 한사람씩 십자가 앞으로 걸어 나온다. 주기도문을 외운 후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십자가를 응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 예식은 매우 오래된 교회 전통이다. 4세기 예루살렘 교회 전통에 따르면 어떤 이는 십자가 앞으로 나와 절하고, 어떤 이는 이마와 눈을 십자가에 대고 입을 맞추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졌다.

Triduum: 고난의 신비, 시간의 신비 (2)
부활절(Easter) 예배를 위한 제안
김정 교수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신비로 기념했다. 죽음 없이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성금요일에서 성토요일을 지나 부활의 주일로 이어지는 사흘을 가리켜 초대교회는 트리두움(Triduum)이라 불렀다. 비록 성토요일에 특별한 예식은 없지만 이 날은 주님이 무덤에 묻히신 날이라는 깊은 신비를 지니고 있다.

1. 부활절 전야(Easter Vigil)

부활절에서 가장 최고조에 이르는 기쁨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날 교회가 세례를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기쁨이다. 초대교회는 사순절에 세례후보자들의 신앙을 마지막으로 점검(Lenten Catechesis)하고 이를 통과한 이들에 한하여 토요일 밤, 즉 부활절 전야를 지키며 기다렸다가 부활 주일 새벽에 세례를 베풀었다. 온 교회가 사순절의 금식에 동참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림과 동시에 부활 주일에 세례 받는 이들의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였다. 따라서 부활절 승리의 외침은 세례를 통해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가 이들의 기쁨과 더불어 온 세상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

2. 부활 주간(Easter Octave)에 행해지던 미스타고지

팔일 간 지속되는 부활 주간에 초대교회는 갓 세례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바로 직전에 경험한 세례와 성찬 성례전의 신비에 관해 가르쳤다. 미스타고지(mystagogy)는 세례 성찬 성례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가르침을 뜻하는 초대교회의 용어이다. 부활 주일 새벽에 세례를 받은 이들이 부활 주일에 모여 자신들이 경험한 성례가 어떤 의미인지 배우는 시간이다. 갓 세례 받은 이들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도 원하면 미스타고지에 참가할 수 있었다. 세례 받지 않은 이들의 참가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아 세례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성인 세례자를 위한 미스타고지가 사라졌다. 5세기 이후 실제로 미스타고지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성인 세례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사순절을 거쳐 부활절에 세례 주기에 힘쓰고 있다.

3. 부활절 예배 제안

비록 세례와 연관된 의미의 기쁨은 사라졌지만 부활절 기쁨은 그 어느 절기보다 크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기쁨의 고백이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절기가 부활절인데, 자칫 초콜렛과 이스터 바니를 앞세운 소비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세상 축제와도 같은 부활절로 축소될 우려가 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 죽음을 넘어 무덤까지 내려가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쁨이 우리의 죄와 아무 상관도 없이 경축되어서는 안된다.

(1) 흰 옷을 입음

부활절 주간이라 일컬어지는 팔일을 가리켜 흰 옷을 입는 주간(week in albis)이라고도 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부활절 세례 받은 이들이 팔 일간 교회에 모여 미스타고지를 행하는데 이때 흰옷을 입는데서 유래한 말이다. 팔 일째 되는 그 다음 주일에 이들은 흰 옷을 벗어두고 자신의 옷을 입고 회중 가운데 앉는다. 부활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부활절 예배 강단을 장식한다. 흰 백합을 사용하는 이유도 그와 같다. 집례자의 가운과 스톨도 흰색으로 장식한다.

(2) 부활초(Easter candle)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온 인류를 위해 평화의 불을 밝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다.

(3) 입례송

부활 주일 새벽에 새롭게 세례 받은 이들이 있다면 흰 옷을 입고 입장한다. 회중석의 맨 앞줄에 이들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부활절의 의미는 강조된다. 즉 세례를 통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된 이들을 바라보면서 회중들은 자신의 옛적 모습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한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덧입은 모든 이들이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4) 할렐루야

집례자가 회중을 향해 “할렐루야”로 인사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고 외친다. 이에 회중은 “주께서 정말로 다시 사셨다”로 화답하며 말씀 예전을 시작한다.

(5) 성경 봉독

부활 절기에 맞는 구약, 서신서, 복음서의 내용을 택한다.

(6) 회중 기도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힌 이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로 큰 기쁨의 소식이다. 이들에게 희망의 메세지가 전달될 수 있도록 부활절 예배는 죄와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스도가 승리하였음을 선포해야 한다. 나아가 세상 고난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종국에는 함께 찬양의 나팔 소리를 울리게 도리라 선포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한다.

(7) 종소리

축도 후 파송 기도와 더불어 주께서 다시 사셨다고 외침과 동시에 종을 힘껏 울리도록 해보자. 어릴 적 기억은 매우 구체적이다. 비록 부활절 예배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축도 후 파송 기도와 더불어 맘껏 종을 흔들어 본 어린이라면 그 기쁨을 기억할 것이다. 종소리와 더불어 전 회중의 웃음 띤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부활절의 기쁨을 알 것이다. 비록 그 깊은 기쁨의 환호성을 신학적으로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해마다 거듭되는 부활절 예배를 통해 어느 날 문득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질 수도 있다. 만일 교회를 떠나 방황하던 중 문득 길 가다 듣게 된 예배당 종소리는 그를 다시 하나님의 전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있다. 때로 설득력 있는 지식보다 기억이 먼저 믿음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 * 본 글은 김정 교수님께서 문화선교연구원에 기고한 글을 재편집하여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 * 블로그 글의 무단 재편집, 기사화를 금합니다.
    • * 출처 : https://www.cricum.org

2021.03.31

글. 김정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예배설교학 교수)